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직봉전쟁 (문단 편집) === [[북경정변]]과 톈진회의 === 그러던 중 10월 23일, 3로군 총사령관 [[펑위샹]]이 [[장쭤린]]에 호응하여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장악, 황부의 섭정내각을 조직하였다. 펑위샹은 차오쿤을 위협하여 산해관 일대의 직군을 직례군무 독리 왕승빈과 직례군무 방판 팽수신에게 접수하게 하였고 손악의 국민군 3군으로 하여금 바오딩의 16혼성여단을 인수하게 하였으며 국민군 1군과 2군을 북상시켜 우페이푸를 견제하게 했다. 차오쿤은 펑위샹의 강요로 인하여 10월 24일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고 통전하며 3가지 사항을 발표했다. * 1. 즉각적인 정전. * 2. 우페이푸의 모든 직위 박탈. * 3. 우페이푸의 즉각적인 하야. 차오쿤은 우페이푸를 청해성 독판에 임명, 변방으로 보내라는 지시까지 수용했으나 우페이푸는 란현에서 차오쿤의 정지 명령은 가짜이므로 따를 수 없다고 선포, 1만명의 잔여병력을 통솔하여 호헌군을 조직하여 베이징을 구하기 위해 남하했다. 하지만 10월 22일 [[장쭝창]]이 마보군 2만을 거느려 냉구에서 나와 란저우를 공격했고 같은날 [[리징린]]도 창려를 점령했다. 10월 25일에 국민군이 조직, 돤치루이를 초청했다. 10월 28일 장쭝창이 란저우를 함락시켰고 장쭝창과 리징린이 톈진을 향해 남하했다. 봉군은 진유선에 집결, 진유 주둔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장쉐량]]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봉군과 국민군의 습격에 우페이푸는 수천명의 병력을 잃고 사실상 붕괴되어 3~5천명의 잔여병력만 남게 되었다. 11월 2일에는 봉군의 강요로 차오쿤이 하야했다. 원래 펑위샹은 차오쿤을 쫓아낼 계획은 없었으나 우페이푸가 정전령을 듣지 않자 우페이푸의 정당성을 완전히 박탈하기 위해 차오쿤 하야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우페이푸는 11월 3일 당고에서 화갑운수선에 탑승, 패잔병들을 거느려 11월 5일 장강 유역으로 피하여 재기를 도모했다. 11월 8일 장쭤린이 위풍당당하게 베이징에 입성, 11월 10일 텐진으로 가서 [[돤치루이]]를 방문하였다. 10월 10일 오후, 돤치루이, 펑위샹, 장쉐량, 루융샹이 톈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비공개로 1차 톈진회의를 열었고 이날 저녁 리징린이 직례독군 왕승빈의 23사단을 무장해제시키고 왕승빈을 톈진의 조계지로 추방했다. 또한 손직부의 20사단 역시 무장해제당하였다. 이들은 봉군에 흡수, 4개 혼성여단으로 편성되어 리징린, 우광신의 병력은 7만명으로 증가했다. 돤치루이는 안휘군벌의 수장이었으나 또한 북양군벌의 존경받는 원로이기도 하였고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안 [[치셰위안]], 소요남, [[쑨촨팡]], 주음인, 최성훈, 마연갑, 이제신, 이병지, [[두시구이]] 등이 난징에서 연명으로 돤치루이 지지를 선포했다. 11월 12일, 리징린은 직례인은 직례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구소를 내걸고 직례성 의회를 통해 직례보안사령관 겸 직례성장에 추대되었다. 11월 12일 오전, 장쭤린과 펑위샹이 따로 돤치루이와 만났고 지휘를 받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오후에 돤치루이가 봉군 장령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으나 장쭤린은 참여하지 않았다. 돤치루이는 경봉선, 진포선을 봉군이 수비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리징린에게 녹종린을 대신하여 경기경비사령관을 맡아달라고 청했으나 리징린이 거절했다. 이날 강소독군 치셰위안이 난징에서 강소, 절강, 강서, 안휘, 섬서, 복건, 사천, 호북, 호남, 하남 10성 동맹회의를 개최, 돤치루이 지지를 선포했다. 11월 15일, 펑위샹, 루융샹, 호경익, 손악, 장쭤린이 연명으로 돤치루이를 임시집정으로 추대하였다. >"국시를 아직 정하지 못했고 국가에 중추적인 주인이 없다. 합비의 돤치루이 공은 원로로서 신망이 높아 나라 안의 사람들이 추대하기로 모두 동의하였다. (...) 개혁이 중단이냐 지속이냐 하는 것은 권한과 책임을 장악하는 것이 잠정적이지 아니어야 한다. 비상시국을 지탱하기 어려우면 돤치루이 공을 바로 오시게 하여 중화민국 임시 집정으로 추대하고 이 어렵고 위험한 시기를 이겨 나가도록 한다." 또한 리징린을 직례독판에 임명, 장쭝창을 강소, 안휘, 산동 삼성토벌군 사령관에 임명했으며 펑위샹에게 경수선, 경한선 방비와 서북둔간 독판직을 맡겼다. 손악은 하남, 섬서, 감숙 삼성 토벌군 사령관에, 호경익은 하남독판에, 장지강은 차하얼 도통에, 이명종은 수원 도통에 임명되었다. 11월 19일 신강, 강소, 섬서, 산서의 4개 성의 독리와 열하, 차하얼, 수원 3개 성의 도통이 돤치루이 추대를 지지했고 치셰위안, 소요남, 쑨촨팡, 두시구이, 주음인, 채성훈, 왕보, 이병지도 다시 돤치루이의 베이징 입성과 국시 해결을 촉구했다. 11월 21일, 돤치루이는 집정 추대를 수락, 11월 22일 베이징에 입성, 23일에 황부 내각이 다음날에 해산될 것임을 전국에 통전했고 11월 24일, 돤치루이가 중화민국 임시 집정에 취임했다. >"공화정을 공고히 하고 민의 뜻을 펼치며 안으로는 더욱 새롭게 하고 밖으로는 국가의 신의를 숭상토록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